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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시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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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 이미지
김득신(金得臣:1604∼1684)

조선 중기의 시인, 한문 4대가의 한 사람


조선조의 시인 ( 詩人 ) ·문신 ( 文臣 ) 으로 자는 자공 ( 子公 ) , 호는 백곡 ( 栢谷 ) ·구석산 인 ( 龜石山人 ) ,본관은 안동 ( 安東 ) 이다. 진주목사 ( 晋州牧使 ) 김시민 ( 金時敏 ) 의 손 자이며, 부제학 ( 副提學 ) 김치 ( 金緻 ) 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천 ( 泗川 ) 목씨 ( 木氏 ) 이다.『임오식년사마방목 ( 壬午式年司馬榜目 ) 』에 의하면, 인조 20년 ( 1642 ) 식년시 진사 에 3등 81인으로 합격했다.

이후 음보 ( 蔭補 ) 로 참봉 ( 參奉 ) 이 됐다. 그리고 현종 3년 ( 1662 ) 증광시 ( 增廣試 ) 문과 ( 文科 ) 에 급제하여 장악원정 ( 掌樂院正 ) ·지제교 ( 知製敎 ) 등을 거쳐 가선대부 ( 嘉善大夫 ) 에 이르고 안풍군 ( 安豊君 ) ) 에 봉해졌다.

숙종조 ( 肅宗朝 ) 에 청백리에 올랐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문명을 떨쳤는데, 신흠 ( 申 欽 ) ·이정구 ( 李廷龜 ) ·장유 ( 張維 ) 와 함께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택당 ( 澤 堂 ) 이식 ( 李植 ) 으로부터 " 당금 ( 當今 ) 의 제일 ( 第一 ) " 이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 다. 특히 시에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선현의 글을 읽는데 힘썼으며, 『사기 ( 史記 ) 』의 「백이전 ( 伯夷傳 ) 」을 1억 1만 3천번을 읽고 그의 서재 ( 書齋 ) 이름을"억만재 ( 億萬齋 ) "라 했다.

뛰어난 문장이 세상에 알려지고 효종은 그의"용호한강시 ( 龍湖漢江詩 ) "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저서로『백곡집 ( 栢谷集 ) 』·『종남총지 ( 終南叢誌 ) 』가 있다. 유학출신으로 서울에 거 주했다.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율리에 있다.

참고문헌 : 증평군지 제4편 성씨와 인물

김득신 묘소(金得臣 墓所)

소재지

증평군 증평읍 율리 산 8-1

규모

봉분 높이 1.6m 묘지둘레 20m

조성시기

1688년 8월

지정번호

충청북도 지정문화재(기념물) 제160호(2014.1.3)

상세설명

증평읍 사무소에서 청안방면으로 가다 증천교 앞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청원군 초정방면의 503번 지방도를 따라 좌구산관광문을 지나 3.5㎞쯤 가면 율리 마을회관이 있다. 이 마을 뒷산에 위치하고 있다.

한남 금북정맨의 최고봉 좌구산 자락에 만장이 잡아준 명당이 조선 중기 최대의 점술가이자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남봉 김치(金緻 : 1577 ~ 1625)와 그의 아들 백곡 김득신이 묻힌 곳이다.

이 묘지 터는 구전(口傳)에 의하면 김치의 상여가 좌구산과 구녀산 사이로 난 분젓치(옛 영남통로)를 넘어 한양으로 가던 중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어상여의 만장이 날아가서 이곳에 앉는지라 명당이라고 생각한 후손들이 이 자리에 묘를 썼다고 한다.

김득신 묘의 봉분은 높이 1.6m이고 묘지둘레는 20m이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묘비석, 동자석이 놓여있다. 김득신의 유적으로는 괴산읍 능촌리 괴강변에 취묵당(醉墨堂)이 있다. 여기엔 ‘독수기(讀數記)’가 걸려 있고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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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21-11-04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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