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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은 42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말단 관직인 숙녕전 참봉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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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뜻을 펼치기에 숙녕전 참봉은 충분치 않은 자리였고 김득신 자신도 맡은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던지 이런 글귀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저무는 봄 날 궁궐에서 숙직하다 보니, 돌아가고픈 마음 성난 말처럼 날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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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득신은 참봉직을 곧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20년 간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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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용산의 한 정자에서 한강을 보며 지은 시 〈용호〉로 인해 천하에 명성을 떨쳤고 〈용호〉는 아직까지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습니다.
古木寒雲裏 (고목한운리) 고목은 찬 구름 속에 잠기고 秋山白雨邊 (추산백우변) 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친다. 江風浪起 (모강풍랑기) 저무는 강에 풍랑이니 漁子急回船 (어자급회선) 어부가 급히 뱃머리 돌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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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득신이 47세 되던 해, 〈용호〉를 읽은 효종은 감탄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시중유화로다. 당나라 사람이 지은 시집에 넣어도 부끄럽지 않을 시구나. 시 속의 풍경을 병풍에 그려 담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