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와 벼슬살이
백곡 김득신(金得臣, 1604년 10월 18일 ~ 1684년 8월 30일)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시인으로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이며 본관은 안동(제학공파)입니다.
조부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로 진주성 대첩을 이룬 것으로 유명한 김시민(金時敏)장군이며, 아버지는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남봉 김치(金緻) 선생이고, 어머니는 사천 목씨(泗川睦氏)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천연두를 심하게 앓아 머리가 아둔해졌다고 하나, 부단한 노력을 통해 1661년(59세)에 이르러 문과 증광시에 합격하여 성균학유로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습니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선생의 벼슬살이는 아래와 같습니다.
- 1645년(42세) 숙녕전 참봉(종9품)
- 1662년(59세) 성균학유
- 1663년(60세) 공조좌랑, 병조좌랑(정6품)
- 1664년(61세) 예조좌랑, 성균관직강(정5품), 홍천현감
- 1666년(63세) 예조정랑, 겸춘추, 사예(정4품)
- 1668년(65세) 제용감정(정3품)
- 1669년(66세) 어모장군, 용양위 부호군, 원양도사
- 1691년(68세) 예빈청, 정선군수, 사예
- 1675년(72세) 숭문원판교, 겸춘추관편수관
- 1676년(73세) 사도시정
- 1681년(78세) 통정대부
- 1683년(80세) 가선대부(종2품)
부족한 자질
선생의 자질은 그리 좋지 못하였습니다. 10살이 되어서야 글을 깨우쳤고, 당시 초등학교 수준의 교재였던 십구사략을 공부하고도 첫 구절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여서 외숙인 목서흠(睦叙欽)은 아예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명문가(名門家)에 바보가 나왔다고 수군덕거렸지만, 부친인 남봉 김치(金緻) 선생은 그런 선생의 노력을 장려하였고 성공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뢰를 주었습니다.
백곡 선생의 아명(兒名)은 ‘몽담(夢聃)’이었는데, 이는 ‘노자의 꿈을 꾸고 태어난 아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입니다.
끝없는 노력
선생은 부족한 자질에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거나, 상(喪)을 치루는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그런 선생의 노력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같은 내용의 글을 수만 번이나 읽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선생은 오히려 그런 자신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고문삼십육수독수기(古文三十六首讀數記)’를 지어 만 번 이상 읽은 문장을 횟수로 기록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모두가 포기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과거에 도전하였고 마침내 59세가 되는 해에 증광시에 급제하여 꿈에 그리던 성균관에 입관합니다.
당대 최고 수준의 시인
선생의 시문은 당대의 수위(首位)를 다툴 정도로 출중했습니다.
1626년(23세) 무렵 공부를 그만두라고 했던 외숙 목서흠으로부터 시를 짓는 재주를 인정받는 걸 시작으로, 한문(漢文) 사대가로 유명한 택당(澤堂) 이식(李植)으로부터 ‘백곡의 문장이 당금제일이다’라는 극찬을 받기도 하였고, 조선 제17대 임금인 효종은 선생이 지은 ‘용호(龍湖)’를 두고 ‘당나라 시에 견줄만 하다’라고 칭찬하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시능궁인(詩能窮人)은 시는 출중하나 궁색한 사람이라는 뜻의 말로 출중한 시창작 실력을 가지고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백곡 김득신 선생을 조롱하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관직에 나가서 역시 ‘시에 빠져 일에는 소홀하다는 평가’로 지방 관직을 저지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억만 번의 독서
‘독수기(讀數記)’에는 선생이 같은 고문(古文)을 수만 번 반복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생이 밝히길 <백이전>과 <노자전> <분왕>을 반복하여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읽은 까닭은 정밀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제책>과 <주책>은 기이하면서 힘차서이고 <능허대기>, <제구양문>은 담긴 뜻이 깊어서, <귀신장>, <의금장>, <중용서> 및 <보망장>은 이치가 분명하고 통창하기 때문이며, <목가산기>는 웅건하고 중후하며 <백리해장>은 말은 간략하나 그 뜻이 깊고, 한유(韓愈)의 글은 규모가 크면서도 농욱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단순히 노둔함 때문인 줄로만 알았던 선생의 독서가 사실은 독서 그 자체에 대한 즐거움과 문장의 완성이라는 문인의 숙명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선생은 갑술년(1634년)부터 경술년(1670)에 이르기까지 <장자>, <사기>, <한서>, <대학>, <중용>도 숱하게 읽었지만 그 횟수가 만 번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기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릇 이들 여러 편의 문체가 모두 다른데 어찌 읽기를 멈추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