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독서량으로 정평이 난 김득신은 31세 때 고문 36편을 반복해서 독파하기 시작했고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몰두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33세의 김득신은 영남지역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전쟁과 피난의 고단함 속에서도 책을 향한 김득신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1637년 봄에 충남 목천으로 돌아온 김득신은 관동을 유랑하다가 삼척 죽서루에서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에 대한 시 登竹西樓(등죽서루)를 짓기도 했습니다.
'중원의 싸우다 흘린 핏물 예전과 다름없이 흐르고 변방의 군사 떠들썩한 소리는 아직껏 진동하네. 홀로 높은 누대에 올라 굽은 난간에 기댔으려니 해당화 떨어지는 강가에는 해가 저문다.'
37세에 이르러서는 외국에서 온 사신을 수행하며 글벗이 되어주는 '백의 제술관’ 으로 추천을 받았고 한문대가인 택당 이식에게 당대 제일의 시문이라고 인정받는 등 뛰어난 글 솜씨가 널리 알려집니다.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끝에 김득신은 39세가 되어서 식년시 진사에 합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