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 주요일화 3편 이미지 1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images/kds/sub02/sub0204_img0301.png)
엄청난 독서량으로 정평이 난 김득신은 31세 때 고문 36편을 반복해서 독파하기 시작했고 한 번 책을 읽기 시작하면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를 정도로 몰두했습니다.
![김득신 주요일화 3편 이미지 2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images/kds/sub02/sub0204_img0302.png)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33세의 김득신은 영남지역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전쟁과 피난의 고단함 속에서도 책을 향한 김득신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김득신 주요일화 3편 이미지 3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images/kds/sub02/sub0204_img0303.png)
1637년 봄에 충남 목천으로 돌아온 김득신은 관동을 유랑하다가 삼척 죽서루에서 아물지 않은 전쟁의 상처에 대한 시 登竹西樓(등죽서루)를 짓기도 했습니다.
'중원의 싸우다 흘린 핏물 예전과 다름없이 흐르고 변방의 군사 떠들썩한 소리는 아직껏 진동하네. 홀로 높은 누대에 올라 굽은 난간에 기댔으려니 해당화 떨어지는 강가에는 해가 저문다.'
![김득신 주요일화 3편 이미지 4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images/kds/sub02/sub0204_img0304.png)
37세에 이르러서는 외국에서 온 사신을 수행하며 글벗이 되어주는 '백의 제술관’ 으로 추천을 받았고 한문대가인 택당 이식에게 당대 제일의 시문이라고 인정받는 등 뛰어난 글 솜씨가 널리 알려집니다.
![김득신 주요일화 3편 이미지 5 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을 참고해주세요](/images/kds/sub02/sub0204_img0305.png)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끝에 김득신은 39세가 되어서 식년시 진사에 합격합니다.